양평, 추읍산 산행기
양평, 추읍산 산행기
산행일시: 2010년05월 13일
누구와: 나홀로
산행거리: 약 6㎞(포장도로약3km+산행거리약3km)
산행시간: 4시간 35분(12:35~17:10)
산행코스:원덕역(12:35)-2코스들머리(13:20)-주능선(14:30)-추읍산정상(14:50,583m)-정상에서약50분 휴식-1코스갈림길(15:55)-전망터(16:10)-1코스날머리(16:45)-원덕역(17:10)
◎전철로 갈 수 있는 산!
서울 근교는 좋은 산이 많다.
산이야 나쁜 산이란 없는 것이긴 하지만 그래도 대중이 선호하고 볼거리가 많고 위험이 수반되지 않는다면 모두 좋은 산이라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서울 근교의 산이 대중으로부터 인기를 누릴 수 있는 조건은 뭐니 뭐니 해도 접근과 이탈이 용이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서울시내에 있는 북한산을 비롯해 많은 산들이 사랑을 너무 받아 몸살을 앓고 있는 실정이며 언제부터인지 서울을 벗어나 교외로 산을 찾고 있다.
전철이 연장 운행하면서 서울 산꾼들의 활동범위도 넓어지는 추세로서 1호선의 연장에 따라 남쪽으로 천안의 광덕산까지 확장되었는가 하면 북으로는 소요산과 고대산을 찾는 산님이 늘었고 2009년에 국철이 국수까지 연장운행하면서 청계산을 찾는 산님이 몇 십 배로 늘어났는가하면 2010년 들어 용문까지 연장하면서 또 하나의 이벤트로 원덕역 인근에 있는 추읍산이 급부상하면서 각광을 받고 있다.
여주가 고향인 필자로서는 학창시절부터 우뚝 솟은 칠읍산을 보아왔는데 이 산 정상을 올라서면 7게의 읍이 보인다 해서 칠읍산으로 불리었는데 도면상에 표기되는 진짜 산명은 추읍산이다.
원덕역에 있는 추읍산 등산안내도
◎행정구역 변경으로 양평이 되어 버린 개군면
추읍산을 품고 있는 개군면은 영조 36년(1760년)에 지금의 여주군에 속한 개군산면이라 칭하였으며 1963년 1월 1일 행정구역의 개편으로 여주군에서 양평군으로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며 개군면의 본래의 이름인 개군산면은 임진왜란 당시에 지역 주민과 관군이 협동하여 구미포에서 왜적과 격전을 벌인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영릉
영릉과 추읍산과의 연관 전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현재 영릉의 자리에는 태종 때 우의정을 지낸 광주 이씨 이인선이 묻혀 있던 곳인데 돌아가실 때 유언으로 "절대 이곳을 넘어 오는 곳에 다리를 놓지 마라"와 "사당을 설치하지 마라" 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곳이 명당이라서인지 정승이 3사람씩 나오는 등 많은 벼슬을 하고 후손이 계속 번창을 했고 그리하자 나중에 후손들이 너무 묘가 초라하다는 뜻이 합쳐져 이곳에 유언을 무시하고 다리와 사당을 설치했다고 한다.
한편, 세종을 처음 모셨던 자리는 현재 서울 서초구에 위치한 대모산 자락에 태종의 능침인 헌릉과 함께 있었는데 시끄럽고 지세가 좋지 않아 신하들이 이곳에 묘를 쓰는 것을 반대했음에도 그럼에도 세종이 그곳을 자신의 묘자리로 잡은 것은 효심 때문으로 그곳에는 세종의 아버지인 태종이 묻혀(헌릉)있었기 때문이었다.
세종이 이곳으로 온 이후 문종이 일찍 죽고 왕위를 계승한 단종은 들째아들 수양에게 왕위를 내준 후 나중에 죽고 많은 대신들이 이에 얽혀 죽으니 세종의 묘자리 때문이라는 풍문이 돌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이장을 해야 한다는 여론이 계속 일어 세종의 손자인 예종 때 이르러 나라의 이름난 풍수지리가가 전국을 누비면서 명당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어느 날, 한 지관이 이곳 영릉근처를 지나가게 되고 갑자기 소낙비가 오는 바람에 다리 밑으로 피했다고 한다.
그런데 빗속으로 보이는 사당의 누각을 발견하고 묘까지 찾게 되는데 풍수지리가는 조산을 타고 내려가던 용이 다시 되돌아 조산을 보고 있는 회룡고조형과 모란꽃이 반쯤 핀 모습으로 보기도하며 한 마리 봉황의 암컷이 알을 품고 있는 모양으로 볼 수도 있는 이곳이야말로 조선 최고의 명당자리로 바로 예종에게 보고를 했다고 한다.
예종은 이 터가 욕심나 여러 날을 고심하다가 방법을 생각해 내고, 당시 평안도 관찰사로 나가는 이인손의 장남 이극배를 불러 차마 묘자리를 비워 달라는 말은 못하고 애원 비슷하게 "경은 얼마나 복이 많아 그토록 좋은 명당을 잡아 아버지를 모셨느뇨. 나는 삼천리강산을 갖고 있으나 할아버지의 능침을 아직도 정하지 못하고 있으니 경이 부럽기만 하오." 라고 심중을 토로했다.
왕이 여러 번 같은 말을 거듭하자, 이극배는 아우들과 상의한 끝에 결국 내 주게 되었다.
후손들이 묘를 파자 그 속에 비기(秘記)가 나왔으며 비기대로 연(鳶)을 띄워서 떨어진 곳에 이장했고 이 때문에 그 곳의 마을 이름은 연하리가 되었다고 전한다.
지금까지 논한 것은 조선실록에 나와 있는 역사와 역사의 언저리에서 함께 전해지는 야사다.
칠읍산(추읍산)과 영릉과의 연계된 전설은 풍수지리가가 예종에게 현재의 영릉터를 천거하고 여주로 천장을 결정한 후 그곳을 파니 물이 하염없이 솟아 임금을 유린한 죄목으로 참수에 처하게 된 풍수지리가는 한 가지의 청을 하는데 그의 마지막 청은 강 건너 칠읍산 꼭대기에 올라 흙을 한 삽 퍼내면 샘솟는 물이 칠읍산으로 빠져 나갈 것이라고 하였다.
참수하기 전 풍수지리가의 청대로 칠읍산 꼭대기에 올라 흙을 한 삽 뜨니 신기하게도 천장터의 물이 칠읍산으로 빠졌으며 천장터에서 왕겨를 뿌리자 칠읍산 꼭대기로 빠져나왔다고 한다.
이로 인해 풍수지리가는 목숨을 구한 것 뿐 아니라 후한 상을 받았고 조선은 천장으로 인해 518년의 역사를 이을 수 있었는데 무학이 한양에 터를 잡을 때는 300년으로 보았다고 하는데 300년 이상의 역사는 천장으로 더 이어갈 수 있었다는 것이다.
◎전철을 이용해 원덕역으로
밤새 근무를 마치고 마음으로 애착을 가지고 있던 추읍산을 가기위해 연장 운행되는 국철을 타고 양평을 지나 원덕으로 향한다.
원덕역
국철은 평일임에도 대만원을 이루고 있는데 그 이유는 노인들이 무료승차를 하는 관계로 승객의 대부분 공짜 손님으로 경로우대석은 물론이고 대부분의 좌석을 점령하고 있으니 문제도 보통문제가 아니다.
물론 모든 게 다 나쁜 것은 아니겠지만 문화비를 지급하고 있는 마당에서 무료승차를 계속시켜야 하는 것인지? 이 시점에서 국민모두 냉철하게 생각해봐야 할 문제일 것이다.
대부분의 노인들은 집에서 눈치를 본다며 이른 새벽부터 나와 전철이나 국철에 올라 종점에서 종점을 오가며 많은 시민에게 피해를 주고 무지한 세금을 낭비하고 있다는 것이며 이로 인해 경로우대를 받으며 나들이나 업무를 봐야하는 노인들까지 모두 도마에 오르는 실정이다.
평일이라 산을 찾는 사람들이 없을 줄 알았는데 칸마다 등산차림의 사람들이 상당수 있었는데 팔당과 양수리 그리고 국수에서 상당수가 내리니 몇몇 안남은 상태로 원덕역에서는 나 혼자만 내리게 되었다.
원덕 역사를 나와 눈앞에 펼쳐진 추읍산을 보고 반갑고 기쁜 마음이 들었는데 어릴 때부터 올라보고 싶었던 산이었는데 늦기는 했지만 이제라도 칠읍산을 오른다니 흐믓했으며 산은 그다지 높지 않아 힘들이지 않고 산행을 할 것 같다.
원덕역에서 본 추읍산 전경
◎들머리를 잘 못 들어 개고생......
등산안내도에 1코스와 2코스로 나누어 져 있어 2코스로 올라 1코스로 내려오기로 작정을 하고 지름길인 철길을 따라 삼성리로 향한다.
삼성리 마을의 다리를 건너고 고가 철길 밑을 지났는데도 들머리 안내판이 없고 원덕역에서 얼뜻 보았던 들머리는 잘 기억이 나지 않고 누구하나 물어볼 주민도 없어 팬션이 밀집되어 있는 길로 들어서 들머리를 잡으니 힘든 산행이 시작된다.
옛 속담에 첫 단추를 잘 끼워야 마지막 단추도 잘 끼울 수 있다고 했는데 들머리를 잘못잡고 편히 산을 오른다고 생각한다면 크게 잘못된 생각일 것이다.
팬션지구로 들어서 ‘음악이 흐르는 팬션’을 지나니 맨 윗쪽 좌측으로 절 같은 집이보이고 우측으로는 비포장 임도로 되어있어 우측으로 들어서며 고생을 하게 되는데 좌측으로 들어섰다면 오르다 2코스와 만날 것 같은 생각이 떠나지 않는 가운데 임도가 끝나고 흔적이 희미한 계곡길로 들어서 조심스럽게 오른다.
그나마 처음에는 희미하게 나있던 길마저 없어지고 산나물 채취꾼들의 발자국인지 사람이 지나간 발자국을 찾아가며 우측 능선으로 접어들기 위해 험하고 가파른 경사지를 오르다 보니 능선에 와 닿고 능선에는 등산안내도에 표기되지 않은 길이 뚜렷이 나있어 이제는 고생이 끝난 것으로 생각하고 몇차례를 급경사를 오르고 또 오른다.
등산로 쉼터에서
능선길에 올라서 한동안을 더 오르니 T형의 길이 나와 당황케 된다.
이 상황에서 우측으로 가야하는지 좌측으로 가야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아 2코스가 가까운 방향인 좌측으로 조금을 이동하니 내리막으로 이어진 것 같은 예감이 들어 다시 원점으로 와서 우측방향으로 한동안을 가보았으나 길은 우측으로 산중턱을 가로지를 뿐 올라가질 않아 다시원점으로 되돌아와서 길이 없는 아주 급한 사면을 힘겹게 오르기 시작한다.
올라가는 길에 나뭇가지사이로 텐트를 친 것을 보고 암자를 개척하기위한 어느 스님의 의도였나 생각하며 두 팔과 두 다리에 힘을 주어가며 힘들게 힘들게 주능선에 오르니 길은 아주 순하고 평탄한 것이 사면을 오를 때와는 완전히 다르다.
정상 못 미처 있는 헬리포터
◎정상에 올라 칠읍을 보니
평일이라 등산객을 만나지 못 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정상을 가기도 전에 2개팀 4명을 만나고 정상을 조금 못미친 지점에 도착하니 군인들의 훈련장과 헬기장을 지나고 100여m도 못간 지점에 추읍산의 정점인 정상에 도착한다.
정상에 도착하니 작고 아담한 정상석이 나를 반기고 사방이 탁 트여 조망의 여건이 잘 갖춰져 있어 좋다.
올해 들어 양평군에서 정상주변의 나무들을 베어내어 조망처로서의 조건을 갖추었으나 정작 용문산 방향으로는 헬기장 근처의 나무에 가려 조망하는데 문제가 있지만 강건너 백병산과 양자산 그리고 앵자봉과 천덕봉이 가까이보이고 북으로 도일봉과 소리산 능선이 선명히 들어오나 가스가 있어 아주 멀리 조망은 시계가 썩 좋지는 않다.
추읍산 정상 풍경
정상에는 감시카메라 탑이 설치되어 있고 바로 옆 테크를 설치하여 편하게 쉬며 남한강과 개군산과 파사성이 있는 파사산 그리고 이포대교를 건너 이포가 눈앞에 펼쳐지고 멀리 여주읍내는 희미하게 보인다.
정상석을 등지고 발 아래로 펼쳐진 풍경이 시원스럽다.
좌측으로 추읍리와 약간 우측으로 교리의 아름다운 농촌의 풍경이 펼쳐지고 평화스럽게 보이는 마을 앞 멀리에는 오대산 두로봉에서 흘러내린 빗물과 속리산 천황봉에서 흘러내린 빗물이 먼 길을 흘러 서로 합쳐 강물을 이루어 남한강이는 이름을 붙이고 유유히 흐른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은 연무로 정확히 잡히지 않지만 애써 찾으려 노력해 본다.
정상 주변은 그런대로 정비가 잘 되었으며 한 달 전에 추읍산을 올랐던 어느 산님의 산행기에는 정상석이 없었는데 지금은 아담한 정상석이 있는 것을 보면 정상섣을 설치한지가 며칠 안 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며 정상 등산안내판에는 추읍산의 또 다른 이름인 칠읍산이라 부르는 이유에 대해 정상에서면 양근 지평 여주 이천 양주 광주 장호원 7개읍이 보인다는 데서 비롯되었다는 설명과 용문산을 보고 읍하는 형상이라 해서 추읍산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나 추읍산보다는 전부터 불리는 칠읍산이 논리에 맞는 것으로 여겨진다.
혼자서 여라가지 포즈를 취하며 증명사진을 찍고 나보다 먼저 정상에 올라 테크에서 쉬고 있는 산님(최영순씨)과 테크에서 발아래 펼쳐진 추읍리와 내리마을을 보며30여분 이상을 대화를 나눈다.
◎하산을 하며
그늘이 없는 테크에서 긴 시간을 보내고 헬기장을 지나 1코스로 갈라지는 이정표에서 헤어져 1코스로 하산을 시작 한다.
산을 오를 때 고생을 해서인지 하산길은 너무 잘 나있어서 편안하다는 생각이 여러 차례 들었으며 갈림길에서 약15분을 내려서 산을 오를 때 T코스의 의문이 풀린다.
이정표에 의하면 약수터가 1.4km로 표기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에서 7부능선을 횡으로 질러 약수터로 가는 길이 있는 것이며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나는 오를 때 좌측과 우측으로 번갈아 왔다 갔다 하며 시간과 체력을 낭비하며 힘든 산행을 하게 된 것이다.
하산길 전망쉼터
약수터 갈림길을 지나 5분여를 내려오면 전망터가 있으며 이곳에는 긴의자 2개가 설치되어 있으며 원덕역 일대를 볼 수 있는 전망대이기는 하나 바위봉우리가 아니므로 시야가 좁고 제한적이다.
전망터를 지나 급경사 길은 계속이어지며 지루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에 두리마을 날머리에 도착을 하고 따가운 햇볕을 쐬며 힘없이 원덕역으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