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독립군과대구참사랑산악회 합동산행기

창녕, 남지 개비리길을 걷다.

범솥말 2025. 5. 2. 20:12

국가명승 제130호

창녕, 남지 개비리길 트레킹이야기

 

산행일시: 20250427

누구와: 대구참사랑산악회원들과 함께

트래킹거리: 약2.74km

트래킹시간: 1시간45(10:35~12:20)

트래킹코스:창나루들머리(10:35)-낙동강전투안내판(10:47)-옥관자바위(11:02)-금천교(11:12)-죽림쉼터(11:16~12:02)-야생화쉼터(12:06)-영아지날머리(12:20)

주요지점 통과 및 이동거리

10:30 창나루 주차장 도착

10:35 남지비리길 창나루주차장에서 트래킹 시작

10:40 마분산과 창나리마을 안내판

10:47 낙동강전투 최후 방어선 안내판

10:52 디딜방아 전시관

11:02 옥관자바위와 층층나무

11:05 이정표(영아지주차장1.53km창나루주차장2.21km)

11:12 대숲(금천교와 감나무 시집보내기 안내판)

11:14 대숲(동천교)

11:16~12:02 대숲(죽림쉼터)

12:06 야생화 쉼터

12:20 영아지주차장 날머리

 

다시 만나는 그리운 친구들.....

사회가 어지럽고 추악한 국개의원들이 개소리를 지껄여도 시계바늘은 멈추지 않고 돌아갑니다.

바라던지, 바라지 않던지 불행하고 잔인했던 4월이 이제 막바지로 접어듭니다.

이맘때가 되면 산야는 진달래가 만개하고 우리의 마음은 1년이면 2번 만나는 친구들이 생각납니다.

열차가 동대구에 도착하고 마중 나온 임대장과 경환 아우를 만나 대기 중인 버스로 이동합니다.

~

그런데 보고 싶었던 친구들이 얼마 보이지 않았으니 실망인지, 걱정인지 암튼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무슨 일이 생겼나?

나쁜 일은 아니겠지?

사람은 이럴 때면 망측한 생각부터 할 때가 있는데 대구 친구들은 아닐 거라는 생각을 합니다.

유난히 부부의가 좋은 상훈네와 대박이네

둘이 친구라더니 짜고 나오지 않기로 했나?

내가 젤 좋아하는 친구들인데........

상훈아우네 아들 군생활도 궁금하고 니들 사는 재미도 궁금했는데...........

대박이는 약방에 감초라

대박이가 없으면 참사랑 활기가 없다, 글구 약간 억센 경상도 사투리에 정미씨 본지도 오래 되었는데..........

그러고 보니 예전에 아이돌 가수처럼 귀공자 같았던 터프가이 성섭아우가 안보이네?

임대장 얘기다, 성섭아우는 고향 향우회 회장으로 오늘 행사가 겹쳤다고 하는데 지난번도 고향행사와 겹치더니 이번에도 겹쳤다.....

담부터는 겹치게 잡지 마라, 아우가 없으면 경숙씨가 측은해 보여서..........

그래도 다행인 건 동서간이라고 했지? 금선씨가 있어서.........

재형이도 없네

임대장 얘기다, 요즘 논문제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바쁘단다.

대단해, 그래서 난 재형이가 좋지,

글구 한티재에서 김밥을 건네주며 격려해주고, 수도산 산행 때 수도사까지 차를 가지고 마중나왔던 채미씨도 생각나네......

산행일정을 잡고 앞에서 끌어주는 임대장이 고맙고

대구팀 중 가장 미남인 경환아우,

항상 밝고 기운이 넘치니 좋아 아마도 그 원동력은 경기도 미인인 옥경씨가 있어서 일거야.......

그리고 수근네, 항상 믿음직하지 예전에는 체력 저하현상이 두드러졌는데 요즘은 자전거를 타서 그런가 쌩쌩하네, 금선씨가 많이 챙겨주나............

글구 함께 산행한 친구

우리와는 첨이지? 말도 별로 없고 무지 착한 것 같던데, 담에 만나면 좋은 친구라더라고 전해주구..........

김원장 내외는 잘 지내는가?

만나지 못해도 연락을 하며 지내야지............

 

남지 개비리길 들머리에서.....

오늘 트래킹을 하는 남지 개비리길은 경상남도 창녕군 남지읍 용산리와 신전리 위치하는 낙동강 하류로 용산리와 신전리 영아지마을을 잇는 2.7km 국가명승 제130호의 낙동강변의 벼랑길입니다.

동대구역을 출발해 영산휴게소에서 아점으로 배를 채우고 창녕으로 들어섭니다.

창녕은 서울에서 먼 곳에 있으므로 갈 기회가 거의 없는 지역으로 창녕을 찾는 게 이번이 세 번째가 됩니다.

맨 처음 창녕을 간 것은 아주 예전일로 온천이 귀했던 시절, 유성온천과 온양온천이 유명세를 타던 때가 있었습니다.

이후 창녕 부곡하와이라는 최신식 온천이 개장하면서 빅이슈가 되었는데 당시 집사람과 부곡하와이를 찾았던 적이 처음이었고, 2012년 명산100산 답사를 하느라 화왕산을 찾았을 때가 두 번째입니다.

고속도로에서 내려 남지읍으로 내섭니다.

오늘이 남지 장날인지 넓은 거리는 일찍부터 시골장 풍경이 펼쳐졌는데 오늘 트래킹이 끝나고 시골 장 구경을 하면 좋을 듯했는데 팀을 이끄는 임대장 성격상 흔히 쓰는 말로 택도 없는 얘기입니다.

남지읍을 빠져나간 우리 버스는 얼마가지 않아 들어선 곳이 용산리 낙동강변 남지수변공원에 도착했고 주차안내원의 신호에 따라 주차장으로 들어섭니다.

주차장에서 수변공원을 보면서 데크길을 따라 올라서며 전망대에서 낙동강과 남강의 두물 머리를 봅니다.

서울 일원인 시인마뇽선배님은 요즘 강따라 걷기를 하시는데 낙동강을 걸으며 얼마 전 이곳 지났다고 하시며 남강과 합강정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강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자료를 보면 이곳 두물머리에 대한 자료는 많이 있는데 이유원의 임하일기에는 낙동강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낙동강(洛東江)은 그 근원이 안동의 태백산(太白山) 황지(黃池)에서 발원하여, 산을 뚫고 흐르기 때문에 그 이름을 천천(穿川)이라고도 한다.

천연대(天淵臺)를 경유하여 탁영담(濯纓潭)이 되고 다시 가야천(伽倻川)을 지나 박진(朴津)이 되어 진강(晉江)과 만난다.

그런 다음 호포(狐浦)를 지나 월당진(月堂津)이 되어 다시 흩어져서 차하(三叉河)가 된다.

금호강(琴湖江)은 그 근원이 청송의 보현산에서 나와서 하빈(河濱)의 고현(古縣)을 경유하여 서쪽에서 낙동강과 서로 만나며, 황둔강(黃芚江)은 그 근원이 무주의 덕유산 불영봉에서 나와서, 합천에 이르러 징심천(澄心川)을 지나서 진천(鎭川)으로 들어갔다가 현창(玄倉)에 이르러 낙동강과 만난다.

그리하여 태백산과 소백산, 조령과 죽령의 이남과 속리산, 황악산, 대덕산, 덕유산, 장안산, 지리산 이동과 고초산(高草山), 백암산, 취서산, 구룡산, 원적산(圓寂山) 이서의 모든 산의 물이 이 강으로 흘러든다.

암튼 시인선배님의 강 이야기도 이런 것 같았는데 강에 대한 공부가 없으니 듣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수변공원에서 남지 개비리길 들머리로 올라서 오늘 예정된 산행을 시작하기에 이릅니다.

오늘 산행과 트래킹의 일정은 용산리 창나리 개비리길에서 우측 능선을 따라 마분산을 넘어 개비리길 종점이 되는 영아지 주차장으로 내려선 후 개비리길을 따라 원점회귀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들머리에 도착하니 불가피하게 일정이 바뀌게 되었으니 최근 대형 산불로 강원 남부와 경북 북부 일대의 큰 피해로 인해 마분산으로 오르는 길이 출입금지 상태였습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개비리길을 트래킹하고 인근의 우포늪을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남지 개비리길은 남쪽 용이 살고 있다는 용산리와 북쪽 영아지가 있고 마분산 우측으로 신전리가 있는데 신전리라는 마을의 재미있는 유래가 있으니 이러합니다.

「옛날 수레실 마을 서재골에 살던 사람과 솔고개에 살던 사람 사이에 땅의 소유 때문에 다툼 일어나 시비를 가리기위해 고을 원님의 재판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사는 곳이 다 같이 수레실이면서 고소장에는 한사람은 차의동, 다른 한사람은 윤동로 쓰자 이것을 본 원님이, “아니 한 마을에 살면서 동리 이름을 각각 다르게 썼으니 어느 것이 맞느냐?”하고 의문을 제기하자 각각 자기가 쓴 마을 이름이 맞다고 우기는 논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래서 새로운 동명을 지어 혼란을 없게 해야겠다고 결심한 원님은 “그곳에 밭이 많고 새롭게 마을 이름을 지으니 새 신(新), 밭 전(田)을 붙여 신전이라 하라”고 하였고 그 이후부터 신전이라 불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남지개비리 옛길 남단에는 용산리 첫 마을은 창나리입니다.

창나리는 창이 있던 나루라는 뜻으로 한자로는 창진(倉津)으로 창고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유래가 있는데, 안내판에 따르면 낙동강을 중심으로 하여 강 건너 백제와 국경을 이루고 있었으므로 군사가 주둔하면서 군사용 큰 창고가 있었다는 설이 있는가하면 나라의 세곡을 보관하는 창고가 있었다고 추정하기도 하는데 암튼 창고가 있는 나루라는 뜻에서 유래된 창나리 마을은 현재까지 불리고 있다는 것이다.

 

국가명승 제130

창녕, 남지 개비리길을 걷다.

마분산 들머리에서 단체사진을 찍고 남지 개비리길 트래킹이 시작됩니다.

남지 개비리길 입구에는 많은 입간판이 설치되어 있는데 명승 개비리길과 마분산을 하나의 코스로 만든 명승, 창녕 남지 개비리길입간판이 눈에 들어옵니다.

입간판에는 개비리길에 대한 간단한 설명과 개비리길과 마분산 곳곳의 지형지물을 설명하고 좌측 하단에는 기음강전투와 걸음강 전설을 기록했습니다.

그런데 이곳 개비리길이 명승이라고 기록은 했는데 안내판 어디에도 국가명승  몇 호로 지정되었는지는 기록이 없었고, 인터넷을 하루 종일 두드려 봐도 이곳 안내판을 카피해서 올린 것뿐 명승 지정번호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국가유산청은 이곳을 국가명승으로 지정했다면 안내문을 기록한 안내판을 세워야 함이 마땅하고, 창녕군에서는 창녕1호 국가명승만 내세울 것이 아니라 창녕 남지 개비리길이 국가명승 제130호라는 사실도 홍보했어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들머리에서 단체사진을 찍고 포장이 되지 않은 개비리길로 들어서면 미루나무와 벚나무가 늦봄의 정취를 나타내고, 반대편에서 오는 사람들의 수도 상당히 많은 편인데 왕복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영아지에서 시작을 했는지 부지런합니다.

개비리길 들머리에서 3분 정도 들어서면 마분산과 창나리마을에 대한 입간판이 있는데 창나리는 창고가 있던 나루, 마분산은 임진왜란 때 홍의장군의 말 무덤이 있는 산이라는 뜻이며 마분산을 창진산이라고 부른 것은 창나루에 있는 산이라는 데서 유래되었다는 기록입니다.

비리길은 벼랑길을 의미하는데 우리나라에 비리길을 명승으로 지정한 곳은 2007년 국가명승 제31호로 지정한 문경, 토끼비리길이 첫 번째이며 이곳 창녕, 남지 개비리길이 두 번째입니다.

동물의 왕국도 아닌데 토끼와 개가 등장하는데 이유는 처음 길을 다닌 게 사마들이 아니고 가파른 잔도길을 토끼, 개 가 다닌 것을 사람들이 알고 위험하지만 지름길로 다닐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하고 사람들이 나중에 다녔으므로 잔도의 개척이 사람이 아닌 동물로 그래서 동물을 앞에 붙인 것 같습니다.

그러면 명승으로 지정할 수 있는 잔도길은 문경토끼비리길과 창녕 개비리길 이외에는 없다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전국적으로 보면 몇 곳은 더 있는데 국가유산청에서 타당성 조사를 하고 지자체와 협의도 끝난 곳도 있는데 지자체도 관광자원으로 이용하기 위해 적극적인 협조하지만 명승으로 지정될 비리길 주변의 토지소유자들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토지소유자들은 명승으로 지정되면 개발에 제한을 받을까 하는 이기심에서이니 이런 현상을 우리는 님비라고 하는데 님비의 원뜻은 내 뒷마당은 안돼(Not In my Back Yird)의 약자로 이기심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마분산과 창나리 입간판을 보고 7분 정도 개비리길을 따르면 길가에 낙동강전투 최후의 방어선입간판이 있는데 일행들이 내용을 읽으며 후미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곳 입간판의 내용을 요약하면 19506.25 한국전쟁 당시 이곳 낙동강 일원을 최후 보루 로 결전을 벌여 승리하므로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낙동강전투 최후의 방어선입간판이 있는 곳을 지나면 민가가 나타나고, 작은 과수원도 보이는데 비리길이라는 뜻은 절벽으로 이어지는 길이라는 뜻인데 이제까지 지나온 길은 평범하기만 한 시골길과 시골의 농지 풍경이었습니다.

앞서가던 수근네와 성섭네 3명이 정답게 가며 우리 3사람의 대화는 우리가 처음 만나던 때와 지금의 우리들의 변화였습니다.

저는 가끔 대구 친구들과 산행했던 산행기를 보고는 하는데 그때마다 느낄 수 있는 게 우리들의 변화였는데 관악산 사진을 보면서 있어야 할 사람은 보이지 않고 모르는 사람이 사진속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치 영화배우나 아이돌 가수처럼 이쁘게 생긴 사람이..........

자세히 보니 성섭아우였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인물을 못 알아보았는데 세월이 지나고 보니 지금의 터프가이로 변한 성섭아우가 예전 사진에서는 멋있게 보였습니다.

물론 다른 친구들도 멋있고 듬직하긴 당연하지만.......

이런 말을 건네자 성섭네와 수근네도 옛날 사진을 보면 세월이 많이 흘렀다는 것에 동감한다는 얘기입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들이 함께한 세월이 18년이 지났으니 우리들의 관계도 보통은 뛰어넘는 것입니다.

개비리길을 지나며 뭔가 특별한 지형지물을 기대하며 5분을 지나자 길가에 디딜방아를 안치한 작은 건물이 나왔는데 아무런 안내판이 없으니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도 아무 의미 없이 지나치고 맙니다.

디딜방아를 지나면 개비리길 길가에 현수막이 있는데 현수막 내용이 이곳은 사유지로 협의가 잘되지 않으면 통행을 불허한다.는 내용입니다.

참으로 안타깝고 한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민심이 이렇게 박해졌단 말인가?

이런 사람들, 자기 땅 아닌 곳은 다니지 않는다는 것인지?,

그럼 남의 땅 밟고 다닐 때 통행료 내고 다니겠다는 얘긴가?

~2918거시기 같네...........

그럼 이 문제는 어떻게 풀 건지, 창녕군의 대응은 어떤지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창녕 남지 개비리길은 죽림쉼터 일부와 옹달샘 부근을 제외하면 대부분 사유지로 민원이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왔던 건으로 30억을 들여 사유지를 매입하고 쉼터와 편의시설을 설치하는 중으로 이곳 창녕 국회의원인 박상웅 의원은 지난 2, 매년 10만명에 가까운 관광객들이 방문하는 창녕군1호 국가 명승지인 창녕 남지 개비리길대부분이 사유지인 관계로 때때로 진입로가 막혀 창녕군과 관광객들이 난감한 상황에 직면했던 안타까운 사례를 해소하기 위해 남지 개비리 명승 내 사유지 매입을 위해 국비 91천만원을 확보했다고 하는데 그러면 좀 나아질 건지............

농지를 보며 한 모퉁이를 돌아가자 입간판이 또 나옵니다.

이건 모야.....

옥관자바위와 층층나무 안내판이 있고 뒤편으로는 옹달샘이 있다는 표기가 있습니다.

옥관자바위 안내판에는 동포마을 박아무개가 이곳을 정리하다가 옥관자 바위를 발견하게 되었는데 옥관자바위와 층층나무와 옹달샘은 서로 연관이 되어 있다는 것이며 층층나무에 대한 내용인 즉 이러합니다.

「경상남도 의령군 지정면 두곡마을에 살았던 재령이씨 한 집안이 1929년 교통이 발달하지 않아 수송이 원활하지 못할 때 낙동강 수로를 이용하여 배를 띄워 사람의 이동이 편리한 물가, 지금의 이곳 옹달샘 주변에 삶의 터전을 마련하고 살았다.

이곳 사람들은 농사일을 하거나 물고기를 시장에 팔아 보릿고개를 면했지만 뱃일을 하는 이씨는 강물 범람하거나 재해가 발생하면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웠는데 그때마다 재령이씨 댁 할머니께서 북풍한설 몰아치는 꼭두새벽에 매일같이 찬물에 목욕하고, 옥관자(玉貫子) 바위 앞에 맑은 정화수 한 그릇을 떠놓고 가정의 무사안녕을 기원했다고 한다.

기도하는 100일째 되는 날 천지신명께서도 그 모습이 가련했는지 날이 샐 무렵에 백발에 긴 수염을 한 산신령께서 강안개를 타고 불현 듯 꿈에 나타나 한 그루 나무를 점지해 주시고 어디론가 유유히 사라져버렸다.

꿈에서 깨어 그 곳으로 가보니 나무껍질에서 광택이 나는 한 그루 나무가 서 있어 할머니는 무릎을 내리치면서 “바로 이 나무다.”하면서 그 날부터 지극정성으로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다.

얼마 되지 않아 슬하에 둔 아들이 관직에 입문하게 되었고, 관재 구설 하나 없이 고을 원까지  올라 층층나무는 영험하기로 유명해졌다.

그 후 남지읍 곳곳에 심어져 자라고 있으며 층층나무를 집에 심어두면 관직과 직장에 있는 사람은 막힘이 없이 관직의 층계 층계를 거쳐서 오르게 된다는 층층나무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이야기를 읽고 옹달샘이 있다는 계곡으로 발길을 돌렸는데 계곡물은 말라있고 옹달샘이라고 찍은 사진이 의심스러워 다른 사람이 찍은 옹달샘을 찾아보았지만 샘이 아니라 그냥 계곡물 같았습니다.

옹달샘을 찾다보니 일행들이 모두 사라지고 성*현씨만 있었으니 급히 일행을 따라 나서야 했습니다.

이정표(영아지주차장1.53km창나루주차장2.21km)를 지나며 모텡이를 돌아서자 개비리길 좌측으로 낭떠러지기 길이 5~6분 지속되었는데 비리길 좌측으로는 안전 로프가 설치되었으며 우측으로는 바위를 깎아 길을 넓히면서 드러난 수평절리와 수직절리가 혼재한 불규칙한 절리가 드러나 있습니다.

간간이 교행하는 사람들을 피해 부지런히 걸어 일행을 따라 잡은 곳은 한 모퉁이를 돌아 대숲이 펼쳐진 안전지대였습니다.

작은 계곡을 가로지르는 곳에 작은 목교가 설치되어 있는데 명승에 설치한 시설물치고는 상당히 조잡했는데 입구와 안내판에는 이곳이 금천교로 기록했는데 안내판의 기록한 금천교로 다리 이름을 정한 뜻은 그럴 듯 했으나 이렇게 초라하게 다리를 만들고 금천교라는 이름을 차용한 것은 궁궐의 금천교를 모욕하는 처사라는 생각이 듭니다.

금천교를 막 건너면 돌탑이 있는데 돌탑에 대한 설명은 보지 못했는데 무슨 연유로 쌓은 탑인지 알 수는 없으며 돌탑 옆에 큰 감나무가 있고 안내판이 있는데 여양 진씨 감나무 시집보내기였습니다.

안내판 설명에 의하면 이곳은 여양진씨의 옛집이 있던 곳이라는 것인데 옛집의 흔적은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여양진씨 집주변에 있던 감나무 시집보낸 흔적을 말함인데 우리가 어렸던 시절에는 나무 시집보낸 것을 곳곳에서 종종 볼 수 있었으며 제가 나서 자란 우리집에도 시집보낸 대추나무가 있었습니다.

왜 나무를 시집보내는지는 안내판에 기록했는데 나뭇가지와 가지 사이에 돌을 끼우면 나무는 스트레스를 받아 종족 본능으로 인해 종자를 퍼트리기 위해 더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는데 이는 과학적으로 증명된 방법이라고 하는데 우리 선조들은 어떻게 이러한 방법을 깨우쳐 나무에 돌을 끼웠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선조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감나무 시집보내기 안내판에서 뒤돌아서면 바로 대숲입니다.

대숲으로 들어서면 길은 양갈래로 갈라지는데 직진으로 가면 곧바로 개비리길로 이어지는 길이고, 좌측으로 가면 대숲을 가로질러 죽림쉼터로 가는 길인데 이곳을 이미 왔었던 임대장은 망서림 없이 죽림쉼터로 향합니다.

이곳 대나무 숲과 개비리길과는 무슨 연관이 있으며, 대나무 숲과 여양 진씨와는 무슨 연관이 있을까?

회락재유허지 안내판에 의하면 이곳은 여양진씨 묘 옆에 있는 재실이 있던 곳이라고 하며 예전 재싱 옆에 초가의 흔적과 관리인이 거주하던 살림집이 있었다고 하는데 일제강점기를 지나며 관리가 되지 않아 긴 세월 귀곡산장으로 변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2015년도 낙동강 남지개비리길 조성사업이 시작되면서 훼손된 회락재는 복구가 어렵게 되자 건물을 철거하고, 대나무를 심어 지금의 죽림쉼터로 탈바꿈했다고 하는데 여양 진씨 재실이 있을 때도 주변에 대나무가 있었다는 것이니 협소했던 대나무 숲이 넓게 조성된 것 같습니다.

긴 대나무 숲을 지나 강가로 접어들면 정자가 나타나니 이곳이 죽림쉼터입니다.

이 정도 위치에 이렇게 멋진 정자에서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신분 상승을 의미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데 예전 같으면 평민은 이러한 정자는 올라설 엄두도 못 냈을 것이고 적어도 지방 수령이나 높은 벼슬아치들이 시나 읊으며 시간을 보냈을 정자입니다.

쉼터 좌측으로 한 팀이 만찬을 벌이고 있었고 주변 다수의 사람들이 있었지만 주변 풍경을 보느라 쉼터는 비어 있었으니 우리 팀이 쉼터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아침 식사한 지도 얼마되지 않았지만 준비한 먹거리를 꺼내 막걸리 한잔을 기울이며 즐거운 시간을 갖습니다.

지난 가을에 이어서 팀원들을 위해 집사람에게 부탁해 도토리묵을 준비했는데 오늘 참여인원도 적기도 했지만 도토리묵은 인기가 없어서 거의 전부에 가깝게 뒷전으로 밀렸으니 버릴 수사 없어 집으로 되가져왔는데 집사람 하는 얘기 다음부터는 도토리묵은 없다.”였습니다.

술도 약한데 주는 술마다 받아 마시다 보니 취기가 돕니다.

임대장이 준비한 대형문어는 통째로 가져왔는데 맞은편에 자리한 시인선배님과 경환아우는 대형 문어다리를 들고 세상을 다 얻은 듯 만족한 표정입니다.

죽림쉼터 정자에서 45분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대나무 숲을 떠납니다.

대나무 숲에서 3~4분을 지나 야생화 쉼터가 나오는데 현재로는 야생화는 보이지 않았는데 이른 봄 야생화가 꽃을 피우고 이미 졌는지 이름만 야생화를 차용하고 야생화는 없는 것인지 알 수는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곳에 벤치 몇 개가 설치된 쉼터와 강가쪽으로 데크전망대를 설치했는데 전망대에서는 양쪽으로 이어지는 잔도길 절벽과 절벽아래 낙동강을 볼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에 가 보고 싶은 생각은 굴뚝같은데 일행들이 모두 가버리고 혼자서 뒤쳐질 수 없어 그냥 지나쳤는데 지금도 많이 아쉽기만 합니다.

야생화 쉼터를 막 지나면 좌측으로 개비리길 가운데 제일 험한 잔도가 시작되는데 아마도 조금전 지나온 데크전망대에서 보면 잔도 아래 절벽 풍경이 펼쳐졌을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잔도길 좌측으로는 안전 로프를 설치했으며 길가에는 마싹이 지천으로 깔렸는데 마줄기 서식지 안내판도 곳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잔도길을 따라 5분을 지나면 잔도길에서 조망을 할 수 있는 바위를 지나게 되는데 우측으로는 낙석방지를 위해 철망을 둘러쳤는데 미관은 떨어지나 안전을 위한 조치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잔도길 바닥에 울퉁불퉁한 흔적을 볼 수 있었는데 안내문에 의하면 공룡발자국이라는 설명이었는데 공룡발자국이 맞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이런 곳에서 주변 조망도 하고 시간을 보내야하는데 이미 이곳을 왔던 대구팀이라 그런지 주변 경관이나 풍경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지 구보 속도로 내달리니 쫒아가기가 힘들 정도입니다.

공룡발자국이 있는 곳을 지나서도 깎아지른 절벽으로 이루어진 잔도는 계속되지만 잡목으로 인해 조망은 없고 앞서간 일행을 따라 잡으려 5분을 정신없이 내달렸는데 일행과 만난 곳은 영아지주차장 바로 직전 망원경이 있는 곳입니다.

남지 개비리길이 끝나는 곳에는 창나리 들머리에서 보았던 것과 똑같은 남지 개비리길의 유래를 기록한 입간판이 있는데 안내판의 내용은 이러합니다.

영아지마을에 사는 황씨 할아버지의 개 누렁이가 11마리의 새끼를 낳았는데 그 중에 한 마리가 유독 눈에 띄게 조그마한 조리쟁이(못나고 작아 볼품이 없다는 뜻의 지방 사투리)였다.

본시 개의 젖이 10개밖에 되지 않아 조리쟁이는 젖먹이 경쟁에서 항상 밀렸고 황씨 할아버 지는 이를 가엾게 여겨 새끼들이 크자 10마리는 남지시장에 내다 팔았지만 조리쟁이는 집에 남겨두었다.

그러던 어느 날 등() 너머 시집간 황씨 할아버지의 딸이 친정에 왔다 가면서 조리쟁이를 키우겠다며 시댁인 알개실로 데려갔다.

며칠 후 황씨 할아버지의 딸은 깜짝 놀랐는데 친정의 누렁이가 조리쟁이에게 젖을 먹이고 있는 것이 아닌겠는가? 누렁이가 젖을 주려고 등을 넘어온 것이었다.

그런일이 있은 후 누렁이는 조리쟁이에게 하루 한번 젖을 먹이고 간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폭설이 내린 날에도 여전히 누렁이는 알게실 마을에 나타났고 마을 사람들은 누렁이가 어느 길로 핬는지 확인하기 위하여 누렁이 뒤를 따라 갔는데 누렁이는 낙동강을 따라 있는 절벽면의 급경사로 눈이 쌓이지 못하고 강으로 떨어져 눈이 없는 곳을 따라 다녔던 것을 확인하였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높은 산고개를 넘는 수고로움을 피하고 개(누렁이)가 다닌 비리(절벽)로 다니게 되어 개비리라는 길 이름으로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또 다른 유래로는 개는 곧 로 물가, 강가를 말하며 비리는 벼랑의 이곳 사투리로 따라서 개비리는 강가에 있는 벼랑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남지 개비리길의 유래를 기록한 입간판에서 이곳을 찾은 연인들이 사진을 찍고 있습니다.

묘령의 여인에게 모델이 되어줄 것을 청하자 기꺼이 응하며 폼생폼사 폼을 잡았고 멋진 사진을 한 장 찍었으니 이것은 초상권 침해가 아닌 정상적인 작품입니다.

같이 온 남자가 모델이 되었으면 돈을 받아야한다.”는 농담에 미인은 모델료를 받지 않는다.”라고 하자 여자는 입이 귀에 걸렸으니 무엇 때문에 좋아하는 걸까?...........

그렇게 우리는 국가명승 제130창녕, 남지 개비리길을 걸었습니다.

어느 새 임대장이 기사선생님에게 콜을 했는지 우리의 애마가 기다리고 있으니 잠시 여유도 없이 우리는 2번째 목적지인 우포늪으로 이동 합니다.

 

우포늪은 보너스로..............

영아지 주차장을 떠난 버스는 어딘지 모르는 길을 달립니다.

25분 정도를 달려 우포늪에 도착합니다.

제가 창녕을 아는 곳은 부곡하와이는 거의 생각이 나지 않고 확실하게 생각나는 게 화왕산입니다.

영아지에서 우포늪으로 가면서 화왕산의 위치를 말하자 경환 아우가 차창 밖으로 보이는 산을 가르치며 화왕산을 말해줍니다.

화왕산 정상일대는 거대한 억새밭이 있는데 예전에는 정상에서 억새태우기 행사가 있어 많은 사람들이 멋진 장면을 보려고 밤에 화왕상 정상으로 몰렸는데 안타깝게 2009년도에 사고가 발생하는 바람에 이후로 행사가 없어졌습니다.

지금 같으면 산불 위험 때문에 상상도 못할 일인데 불과 16년전에는 이런 행사를 했다는 것인데 우리는 우포늪으로 이동하며 화왕산 억새태우기 행사이야기를 나누며 이동합니다.

우포늪에 도착합니다.

피곤한지 차회장과 여학생들은 버스에서 휴식을 취하고 나머지는 우포늪으로 이동했는데 우포늪에는 생각했던 것보다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주차장 옆에 안내판이 있는데 이러합니다.

우포늪은 창녕군 대합면, 이방면, 유어면, 대지면 일대에 형성된 총면적2.505k(습지보호지역8,547.000)의 우리나라 내륙 최대습지로서 각종 야생생물의 서식처를 제공하는 생태적 기능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광활한 우포늪에는 가시연꽃, 자라풀, 마름 등 다양한 수생식물이 자라고 있으며 철새도래지로서 멸종위기 야생동물인 큰고니, 따오기, 노랑부리저어새 등 200여종의 조류와 수달, 담비, 삵 등의 동물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도로 나타낸 탐방코스는 크게는 3코스, 작게는 6코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주차장에서 5분을 들어서자 갈림길이 나옵니다.

임대장이 하는 얘기입니다.

우포늪을 방문할 때는 비가오고 난 아침 일찍 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안개가 자욱한 우포늪의 풍경이 너무나 좋다는 것인데 일반적으로 우포늪을 TV로 보면 안개가 자욱한 풍경이거나 이른 새벽 풍경을 보고는 했으므로 아무 때나 찾아도 그러한 풍경을 보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건 아닌 것이었습니다.

우포늪하면 떠오르는 것이 자욱한 아침 안개가 드리운 풍경도 남아 있지만 그보다 더 자극적인 것은 우포늪에서 황소개구리가 뱀을 잡아먹는 풍경이 잊혀 지지 않습니다.

길을 따라 내려가니 광활한 우포늪이 모습을 보입니다.

우포늪 가장자리에서 단체로 사진을 찍고 임대장이 포토존에서 화왕산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어 줍니다.

그리고 이어서 간 곳은 데크계단길을 올라 우포늪 전망대였습니다.

입장료를 받지 않아서인지 청소상태는 좋지 않았고 전망대 안에는 밤새 문이 열려 있었는지 곤충들이 무척 많이 들어와 있었고 우포늪 전시모형물은 청소가 안 된 것인지 아크릴 판이 훼손 된 것인지 육안으로도 보기 힘들 정도였으니 사진을 찍어 판독하기에는 부적합했습니다.

전망대 안에 망원경이 있습니다.

*현 아우가 무언가 열심히 찾더니 쾌재를 부르며 내게 망원경을 보라고 권하며 멸종위기 따오기 2마리가 망원경으로 포착된다는 것입니다.

그렀습니다.

영상이나 사진으로 보던 따오기가 육안으로는 식별이 어렵지만 망원경으로는 확실하게 식별이 가능했는데 분명 따오기가 맞았습니다.

여기서

국가유산청에 따오기에 대해 물어보았습니다.

국가유산청에서는 환경부와 협업하여 멸종위기, 또는 멸종된 조류나 동물들을 복원하는 작업을 하고 있는지 여러 해가 지났다고 합니다.

예산 황새마을에는 멸종된 황새를 다량으로 부화한 뒤 자연 방사하고 있고, 지리산에는 반달곰을, 이곳 우포늪에는 따오기를 자연방사하여 복원하고 있는데 그 결과가 나타나고 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대부분 멸종된 동물이나 조류의 종자는 일본이나 중국에서 들여오는데 일본이나 중국에서 그냥 주지 않으므로 일본이나 중국에서는 멸종되었지만 우리나라에는 있는 동물이나 조류를 서로 교환하는 방식으로 종자를 마련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휘귀 동물이나 조류는 해와로 반출하는 게 어렵기 때문에 다른나라로 주거나 들여오기가 아주 어렵다고 합니다.

우포늪 전망대 안에도 이와같은 내용의 안내판이 있습니다.

따오기는 중국의 후진따오 주석이 방한할 때 주기로 약속하므로 확보할 수 있었다고 하는데 암컷1마리에 수컷3마리를 들여와 복원에 성공했다고 합니다.

임대장 얘기입니다.

이곳 우포늪은 너무 넓어서 제대로 구경을 하려면 하루도 모자라며 대충 관람로를 따라 걸어도 3시간 이상이 걸린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제대로 보려면 다음에 시간을 내서 또 오고 오늘은 요기까지 맛배기만 보여준다는 의미인 것 같습니다.

전망대에서 나와 우포늪 주변으로 내려가나 했는데 산길을 따라 역방향으로 갑니다.

10분을 지나 내려선 곳은 우리의 애마가 있는 곳으로 원점회귀를 했습니다.

우리를 태운 애마는 고속도로를 질주하여 동대구역에서 멀지 않은 곳, 닭똥집골목에 도착했고 술 한 잔 기울이며 오늘이야기 그리고 사람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냅니다.